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비트 힐베르트 (문단 편집) == 여담 ==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가 지은 이름 탓에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많이 받아[* '다비드'는 당연히 구약의 [[다윗]] 왕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본명은 매우 길다.] 피해를 본 일이 적지 않았다. 나치에 의해 유대인 교수들이 쫓겨난 다음 어떤 나치 장관이 힐베르트와의 대담에서 최근 유대인 축출 때문에 괴팅겐 대학 수학과도 피해를 보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마 그 당원은 유대인이 없는 학계는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인데, 힐베르트는 "피해라고요? 괴팅겐에서 수학이라는 학문은 '''사라졌습니다!'''"라고 답해 그 장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나치의 핍박은 유럽의 과학과 수학 명문으로 불리던 괴팅겐 대학을 쇠퇴시키고, 나치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과학자나 수학자들이 미국으로 넘어가서 학문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 [[뇌터 정리]]로 유명한 여성 수학자인 [[에미 뇌터]]를 무척 아꼈다. 아버지인 막스 뇌터(Max Noether, 1844–1921)가 유명한 수학자였는데 그녀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수학을 교육받으며 수학자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괴팅겐 대학 측은 그녀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힐베르트가 분노하여 그의 이름으로 된 강의를 뇌터가 맡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그런 강의들을 선전해 주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힐베르트는 그녀를 대학 교수로 강력 추천했지만 역시 반대를 많이 듣자 "교수 후보자의 성별이 그녀의 교수 자격을 허가하는데 뭔 관계가 있냐? 대학 평의원회는 대중 목욕탕이 아니다!"라며 반발하여 그녀를 계속 추천했다. 결국 1919년 뇌터는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된다. 이러다 보니 뇌터와 힐베르트는 무척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유태인]]인 뇌터는 나치가 집권하자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미국으로 가서 브린마르 대학 교수가 되지만 몇해 안 가 병으로 죽었다. 친척도 없이 미국에서 죽어 쓸쓸히 브린마르 대학 측 캠퍼스 홀에 묻혀야 했고 힐베르트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침통해했다. 여담인데 에미 뇌터의 남동생인 프리츠 뇌터(Fitz Noether, 1884–1941)도 수학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그도 유태인이라 축출되었고 소련으로 가서 활동했으나 1941년 반소련 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하였다. * 힐베르트에게는 아들 1명이 유일한 자식이었는데,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아들은 지능장애가 너무 심해 공공시설로 보내졌고, 힐베르트는 아들을 시설로 보낸 이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단종법에 따라 아들은 거세되었고, 이렇게 이 가문은 힐베르트 사후 대가 끊겼다. * 힐베르트는 건망증이 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어느 날 힐베르트는 집에 초대한 손님들과 오랜 시간 얘기를 하던 중 그곳이 자신의 집인 것을 깜빡 잊고 자기가 방문한 것으로 착각하여 옆에 있던 부인에게 "이거 너무 오랫동안 실례했군. 이제 그만 집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쎈 중등 수학 3(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